역사의 봄을 몰고 오는 징후들

쿠바-미국 관계의 전환은 북-미 관계 대전환의 예고편

15-03-30 11:25ㅣ 지창영 시인, 번역가 (jck-mail@hanmail.net) 


바다의 수면만 바라보면 늘 똑같은 모습만 보인다. 검푸른 물결만 보일 뿐, 물밑으로 고래가 떼를 지어 이동하는지 잠수함이 지나가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물 속에 있는 것들이 수면 가까이 부상하면 그림자가 보이고 수면 위로 떠오르면 비로소 만인이 볼 수 있게 된다.
 
지금 세계와 한반도 정세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을까? 예전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빠른 속도로 드러나고 있다. 잠수함으로 치면 완전히 부상한 것은 아니지만 마스트와 잠망경 정도가 수면 위로 드러난 정도라고나 할까.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시간 문제다.
 
물밑의 일들이 드러난 예로 쿠바와 미국의 관계 개선, 주한 미 대사 테러에 대한 미국의 반응, 박상학의 대북 삐라 포기, 김무성의 ‘북한 핵 보유국’ 발언, 미국의 사드 무용론 그리고 북의 미 본토 타격 능력 인정 등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일들이 각기 하나의 점으로 독립되어 있을 때는 우연으로 보이지만 이들을 선으로 연결해 보면 거대한 변화의 그림자가 뚜렷하게 보인다.
 

쿠바와 미국의 관계 개선
 
지난 2014년 12월 17일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공식 성명을 통해 ‘미국은 쿠바와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기 위한 역사적 조치들을 취할 것’이라며 즉각 쿠바와의 외교 관계 정상화 협상을 진행하라고 존 케리 국무장관에게 지시했다. 이러한 조치는 쿠바의 고립과 압박을 지속적으로 감행해 왔던 미국의 정책이 실패했음을 자인하는 것이었다.
 
1959년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쿠바 혁명 이래 반세기 넘도록 미국은 쿠바 정부를 전복시키고자 갖은 공작을 진행해 왔다. 미국의 압박에 대응하기 위하여 쿠바는 소련의 핵미사일을 배치하고자 하는 바람에 한때 핵전쟁의 공포가 지구촌을 위협하기도 했으니 이것이 1962년의 ‘카리브해 위기’다. 미국의 시각에서는 이를 ‘쿠바 미사일 위기’라 부른다. 어떻게든 쿠바에게 나쁜 이미지를 씌우고 문제의 원인을 쿠바에 돌리려는 노림수가 반영된 명칭이다.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약속으로 위기는 타개했지만 이후 미국은 쿠바에 대해 외교적 경제적으로 봉쇄 정책을 단행했다. 이로 인하여 어려움에 처하자 수많은 인민들이 보트나 뗏목을 타고 쿠바를 탈출하여 미국으로 들어갔다. 1992년에는 ‘쿠바민주화법’이라는 이름으로 봉쇄 정책을 입법화하여 통상 제재를 지속했고, 부시 행정부 때에는 쿠바 출신 이민자들이 본국에 송금하는 것도 차단했다.
 
오바마의 관계 개선 선언으로 쿠바-미국 관계는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는 미국 대사관이 개설될 것이다. 쿠바와 미국 관계의 대전환은 곧 벌어질 북-미 관계 대전환의 예고편에 불과할 것으로 보인다.
 

수면 위로 드러나는 북-미 관계 개선
 
지난 3월 11일자 <워싱턴타임즈>에는 놀랄 만한 기사가 실렸다. 미국 정부가 비밀리에 북한과 회담을 진행중이라는 내용이다. 워싱턴타임즈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결국 관계 정상화로 이어질 계획의 일환으로서 북한과 비밀회담을 갖기 위해 조용히 활동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해 12월 미국이 쿠바와 관계 정상화를 선언하면서 북과의 관계 정상화도 관측되기는 했지만 미국의 유력 언론에 이처럼 구체적으로 보도된 것은 처음으로서 참으로 가슴 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북-미 간 해빙의 날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한미 군사훈련 기간인 3, 4월에 약간의 잡음이 있을 수 있지만 이는 보수측의 동요를 방지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일 것이다. 또한 세계 최강의 자리를 유지해 온 미국의 체면이 구기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할 것이다.
 
갑자기 관계를 정상화한다고 하면 한국은 물론 미국 내 보수측에서 동요와 반발이 극심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래서 오바마는 드러내 놓고 북한과 관계 정상화를 진행하기 어려운 것이다. 또한 급격히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면 미국이 북한에 굴복했다는 인상을 강하게 줄 수 있다. 그래서 천천히 시간을 두고 밀고 당기면서 가는 것이다.
 
최종 목적지는 이미 정해진 것으로 보인다. 북-미 간 평화협정 체결과 정상회담도 전망된다. 그렇게 되면 남북한 그리고 미국이 서로 공존 공영하는 가운데 한반도는 통일의 길로 접어들게 될 것이다.
 

몇 가지 부수적인 징후들
 
위와 같은 흐름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보이는 최근의 징후들을 몇 가지만 들어 본다.
 
첫째,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가 테러를 당한 상황에서도 미국은 매우 차분했다. 지난 3월 5일 발생한 이 테러 사건은 공안 탄압과 남북 대결 강화에 이용당할 것이 우려되었으나 미국은 오히려 한국 내 일각의 과잉된 분위기와는 달리 차분하게 대응했다. 이로써 ‘한-미 동맹에 대한 테러’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은 무색해졌다. 미국이 냉정한 태도를 보인 것은 대결을 부추길 필요가 없거나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조치라고 볼 여지가 있다. 미국은 남한 내의 과잉된 극우 편향 세력이 오히려 부담스러운 눈치다.
 
둘째, 대북 삐라 살포가 별안간 힘을 잃었다. 지난 3월 23일 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는 대북 전단 살포를 당분간 중단한다고 밝혔다. 천안함 5주년을 맞아 북의 사과를 요구하면서 호기롭게 나서던 그의 태도가 돌변한 것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박상학은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나란히 사진을 찍을 정도로 미국과의 관계가 돈독하며 삐라 살포에 필요한 자금도 상당 부분 미국에 의존한다. 삐라 살포를 중단하겠다는 박상학의 발표는 곧 미국의 입장으로 읽을 수 있다.
 
셋째, 정치권 일각에서 북이 핵보유국임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지난 3월 24일, 새누리당의 김무성 대표는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이는 북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지 않는 정부의 입장과 상반되는 것으로서 보수 집권당의 대표가 이렇게 밝혔다는 사실이 매우 이례적이다. 한국군 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는 미국의 입장이 반영되지 않고서는 함부로 내뱉을 수 없는 말이기도 하다. 일각에서는 미국의 미사일 방어 체계인 사드를 도입하기 위한 대국민 위협용이라고 판단하기도 하나 다음 징후를 보면 그것이 설득력이 없음을 알게 된다.
 
넷째, 미국은 사드가 별 소용이 없다고 밝히고 나섰다. 재미 언론 <라디오코리아>에 따르면 미국 육군참모총장과 해군참모총장이 동시에 사드를 포함한 MD(미사일방어체제)가 비용에 비해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밝혔다고 한다. 천문학적 비용이 소요됨에도 불구하고 요격미사일이 적의 미사일을 놓칠 수 있으며 심지어 아군에게 오폭 피해를 입힐 위험까지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다섯째, 미국은 북의 미 본토 타격 능력을 인정하고 나섰다. 제임스 클래퍼 미국 국가정보국장은 지난 25일(현지 시각) 하원 세출위원회 국방분과위에 제출한 서면증언에서 북의 KN-08을 언급하면서 실전 배치를 위한 초기 수순에 들어가 있다고 평가했다. KN-08은 최대 사거리가 1만2천㎞로서 미국 본토가 사정권에 들어간다.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미 실전배치가 끝난 것으로 평가되지만 미국은 그동안 이를 숨기고 있었다. 이제 와서 미국이 이를 인정하는 것은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징후들을 종합해 보면 미국은 북의 군사력을 더 이상 숨기거나 과소평가할 의사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북이 핵 보유국임을 인정하고 북의 미 본토 타격 능력도 부인하지 않는다. 변화의 방향은 뚜렷하다. 더 이상 북과 대결할 의지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타임즈>의 보도대로 북과 관계 개선에 나선 미국은 적대 정책에 쓰였던 과거의 유산을 하나하나 청산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때보다 진하게 풍겨 오는 봄내음
 
북과 미국이 그간의 상호 적대 정책을 과감히 전환하여 화해와 관계 정상화로 나아간다면 세계의 판도는 사뭇 달라질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국제무대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던 북이 잠수함 부상하듯 급부상하여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다.
 
남북 관계 또한 급진전되지 않을 수 없다. 6.15와 10.4 선언으로 대표되는 남북 관계 개선의 길이 빠르게 회복되고 남북 정상 간의 회담으로 대미를 장식하면 새로운 한반도가 펼쳐질 것이다. 이산가족은 물론 일반 국민/인민들이 자유롭게 왕래하면서 민족의 한이 풀리고, 분단 리스크가 사라지면서 경제 또한 막대한 상호 이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지금은 비록 앞이 캄캄하고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어 보이나 우리가 알게 모르게 분명 봄은 오고 있다. 해마다 때가 되면 왔다가 가는 자연의 계절만이 아니라 온 세계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역사의 봄이 오고 있는 것이다.

Posted by PoetT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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